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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도 정치적으로 진보니 보수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20세기 중반의 쿤과 포퍼의 과학철학을 살펴보면 쿤보다 포퍼가 조금 더 보수적인 것 같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탄탄한 철학적 기반 위에 과학을 세우려고 했고, 포퍼는 검증의 개념을 반증으로 바꾼 것에서 차이를 보일 뿐 철학에 기반을 둔 과학이 결국은 합리적이고 실재적인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법한;, '상대성'을 과학에 도입한 급진적 과학철학자로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지은이 풀러는 "포퍼는 역동적인 탐구의 한 형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민주주의자이고, 쿤은 안정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과학에 초점을 둔 엘리트주의(혹은 보수주의)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의의 중심은 쿤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다. 쿤에 대한 가치판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은 쿤-포퍼의 논쟁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쿤을 까기 위한 의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쿤이 과학의 사회적 기능을 '고의적으로 은폐'했고, '생략'하고 '왜곡'했다고 이야기한다.(물론 딱 한가지, 조직된 연구로서의 '패러다임'의 기능만 빼놓고!) 쿤의 방관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와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시대적 책임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쿤/하이데거주의자들의 정당화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것에 '거의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한 포퍼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도 빼놓지 않는다. 포퍼의 사상은 포퍼-라카토슈-풀러 순으로 계승되는 건가?
2.
아무튼 내가 이해한 것은 딱 요기까지고, 얇은 책인데 진짜 어렵다. 풀러는 쿤-포퍼 논쟁을 사회학적, 도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흄, 칸트(+신흄주의자, 신칸트주의자) 등 근대철학자들은 물론 하이데거, 하버마스, 아도르노 등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는 철학자들, 브루너, 브룬스비크, 피아제 같은 "뭐임? 먹는거임?" 질문을 던질법한 학자들까지 대부분의 사상가들의 논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설명한다. "포퍼가 아도르노와의 유일한 차이점은 계몽의 기획의 현 상태에 대한 관점이다." 이렇게만 띡 나오면 어떻게 이해하라는거냐;;
공부 못하는 애들이 번역탓 한다고... 전반적으로 번역문장이 길고 명사 만으로 문장을 이끌고 있어 문장 하나하나를 재번역해서 읽어야 한다. ("근본으로의 회귀는 또한 당대의 철학적 수사학에도 공적 생활을 어지럽히는 공약불가능한 담론들의 소음 저변에 깔린 언어 이전의 존재 근거에 대한 탐구로 반영되었다")
과학철학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철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사회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공부도 함께 해야할 것 같다. 아, 물론 과학 공부는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읽을 책은 칼 포퍼의 <현대 과학철학 논쟁>(아르케, 2001).
<검은 집>을 읽은 후에 제대로 읽어보려고 맘 먹었는데 사이코패스란 개념이 생각만큼 손에 잡히진 않는다. <검은 집>에서 언급된 것과 달리 사이코패스는 롬브로소의 두개골학을 통한 범죄자형 등과 (당연히!)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그 발현에 있어 nature와 nurture중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 일말의 단서조차 없다. 아마 대부분의 비슷한 논쟁에서와 같이 두 점을 잇는 수직선의 어느 부근에 존재하긴 하겠지? 사회질서를 야금야금 부식시키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직까지는 없다고 하는데, 사이코패스들에게 그들의 범죄가 전체 사회가 아니라 사이코패스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 방법은 왠지 낯설지가 않아 보이지? <검은 집>의 작가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의 중 무섭게 공감이 가는 것은 사이코패스들이 현 사회의 '진화한 인류형'일 수도 있다는 것.
무섭고 신경쓰인다. 그저 신경쓰지 말고 내 주위에 비-범죄형 사이코패스들에게 말리지 말게 현명하게 살기. (맘대로 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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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우석훈 씨와 주경복 씨가 각각 해제와 부록을 썼다. 기아의 원인에 대해 워싱턴 합의다 신자유주의다 뭐라뭐라 하는데 관심도 없고 잘 모르겠고, 다만 도대체 왜 세계는 이렇게 불합리할 수 밖에 없는지 답답해진다. 맬서스의 신화 같은 것을 봐도 '합리적'이란 단어가 무척 주관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아가들이나 열심히 살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것, 이유를 모르는 채로 굶주리고 죽어 나가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잖아!
더 답답한 건 이 불합리한 사회를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는 거.(부록에도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변혁을 이루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데 이렇게 무력해 보일수가.) 슬프지만 사회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개인의 불행한 삶에는 일말의 도움이나마 줄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월드비전 해외아동후원 신청을 했다. 맘이 바뀔까봐 복지관에서 누구 코에 붙이라고 주는 활동비 통장에 자동이체 신청해버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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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슴에선 쉼 없이 희망이 솟는구나.
현재는 축복받지 못했으나, 항상 기다리는 미래의 축복.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은
다가올 삶을 기대하며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하노라.
보라, 저 가엾은 인디언! 배우지 못한 저들의 마음은
구름 속에서 신의 모습을 보고, 바람 속에서 신의 소리를 듣는구나.
그이 영혼의 당당한 지식은 길 잃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네.
저 멀리 태양의 행보나 은하수에서도.
그러나 단순한 자연이 그이의 희망에게 선사한 것은
구름 덮인 언덕 너머, 시시한 천국이었으니.
- 알렉산더 포프 <인간론>. 1733 올렸던 셔머의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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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회의주의에 회의적인 것은 선행적 회의주의와 결론적 회의주의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행적 회의주의는 잘 알려진 데카르트 아저씨의 회의 방법- 우선 닥치고 회의하고 보는 것(-_-)이다. 셔머가 책 속에서 뉴에이지 과학, 지적 설계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견해에 회의를 취하는 방식은 결론적 회의주의 - 즉, 흄이 수용했던 회의 방법으로 "오류 가능한 감각이 산출한 '결론'을 인식하고 이성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에 "끊임없이 반박과 확증에 열려 있는 시험 가능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탐구의 과정"인 과학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과학 역시 방법론적으로 결론적 회의주의를 취해야 된다는 것은 자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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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강조한 회의 방법으로 회의적으로 책을 읽다보니, 저자가 '아인 랜드'(<아틀라스>의 저자)의 객관주의 철학을 비판한 맥락과 같은 맥락으로 회의주의에 대한 희망(?)을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성적 회의 역시 잘못된 믿음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으니. 나름 비판적으로 책을 읽었다고 좋아했더니-.-, 저자는 후기에서 이것이 독자가 자주 맞닥뜨리는 '오해'라고 하며, 회의주의는 입장이 아니고 방법일 뿐이라고 한다. (Cogito tute! 스스로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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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비슷한 류의 책을 많이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도킨스, 굴드, 티비에서만 봤던 어메이징 랜디 아저씨까지(>_< 요 아저씨보면 자꾸 덤블도어랑 이미지가 겹침) 아는 사람이 많이 등장했고 이 사람들 전부 회의주의 학회의 회원인듯 하다. 나도 <스켑틱>이나 구독해볼까. ㅋㅋ =_= 포퍼,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 이 아저씨들 책은 언제 읽냐. 암튼;;; 이어서 읽을 책은 북코아에서 어렵게 구한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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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의 불멸성을 믿지 않으며, 윤리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뒷받침이 전혀 없는 순전히 인간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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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 속의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능력이 점점 커지고, 계속해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게 된다. 소유는 사람을 수동적이고, 게으르고, 오만하게 만든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 고트홀트 레싱 <안티 괴제>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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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Stimme der Vernunft ist leise.'
: 이성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리고 끈질기기도 하다.)
기독교인인 내가 종교비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도킨스옹의 '만들어진 신'이었으니 그 책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도킨스 옹이 비판한 '만들어진 신'은 기독교의 신이었던 반면, 히친스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의 신은 물론 불교까지 함께 비판한다.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사실 하나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불교 역시 히친스의 혹독하고 빠져나갈 곳 없어 보이는 비판에서 예외는 아니기에 도킨스 옹의 책보다 좀 더 균형있어 보인다. 도킨스 옹이 진화생물학자로 과학을 필두로 기독교의 신과 믿음을 비판한 것과 비교해보자면, 히친스는 좀 더 폭넓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 구약의 기초인 창조론과 현대 과학의 진화론이 대립하고 있다면 (솔직히 창조'론'이니 창조'과학'이니 하는 말이 모순된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하겠다면야.), 과학을 필두로 한 종교 비판이 꽤나 중요할 법 한데 히친스는 단 한 챕터에서만 그에 대해 다루고 있을 뿐이다. (대신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을 추천해주고 있다. 굴드는 '과학과 종교가 다루는 영역은 다르다'고 주장했는데?) 도킨스 옹이 '아동 학대증'을 가진 신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히친스는 종교와 성의 근본적인 공명구조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샅샅히 파헤친다. 이렇게 두 책을 비교해 읽는 것도 나름의 재미일 것이다.
마지막 챕터에 등장하는 아인슈타인과 레싱의 말만을 인용한 것은, 책에서 나열한 수많은 역사적 사실보다,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믿음'의 근원, 계몽주의자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탐구와 이성에 대한 그 놀라운 신뢰가 맘에 들었기 때문.
현대인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신의 '존재여부'라기 보다는 신의 '필요유무'일지도 모른다. 나는 죄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학대당하고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간혹 이것이 '더 큰 완전성을 위한' 신의 계획이 맞는가 의심할 때가 있다. 다만 도킨스 옹이 나약한 인간이 믿는 비이성적인 문화라고 종교를 비판하더라도, 내 자신의 나약함에 의지하는 것이 아직까지 몹시도 힘든 일이기에, 그 많은 비판과 헛점에도 불구하고 신을 향해 무릎을 꿇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믿는 교단과 교회의 신, 그 배타적이고 잔혹해보이는 그 신이, 내가 의지하는 그 사랑의 신은 아닐꺼라고 소심하게 외칠 뿐이다.
세상에는 전쟁과 재해로 배울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아이들이 무수히 많다. 다른 무엇보다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절실히 원하는 수억의 어린이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을 입에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볼 때 예외적인 일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 p. 43
등가교환의 원칙을 학교 교육에 대입하면 교육의 존립이 흔들린다. 만약 학생들이 소비주체라고 인정해 버린다면 교육의 장에서 제공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할 권리는 아이들 손에 맡겨지게 된다. ... 배움은 시장 원리를 기초로 삼을 수 없다. - p. 70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에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았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교육 붕괴의 가장 근본에 있다고 본다. - p. 86
능력주의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동기'가 만인에게 평등하게 부여되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현실에서는 능력주의에서 사회적 상승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인 '노력할 능력'에는 분명히 출신 계층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 - p. 104
교육받을 기회를 저버리고 공부해서 도피, 사회생활을 거부하고 노동에서 도피하는 현 일본의 '하류지향' 추세의 원인을, 공부와 노동을 소비와 같이 등가교환, 무시간적 모델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미국식 모델을 받아들이면서?) 분석한다.
장애인 절반이 초졸 이하의 학력이며 '교육을 받을 권리'를 위해 싸우는데, 한쪽에서는 공부에서 자발적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그렇지만 교육과 노동만을 숭고한 가치로, 소비지향 사회와 외떨어져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요기까지; 어려운 책은 아닌데 서평을 좀 써보려니 힘들군. -_-
글 쓰기에 대해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던 중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책을 만났다. 이 책은 우리 학교 대학신문에 추천도서로 올라온 책인데 마침 내 손에 들어오다니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들에 일말의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받자마자 정신없이 읽게 되었다. 책을 처음 받고 이 책의 종류는 글쓰기에 대한 자기계발서+고전해설서 쯤 되는 책이라고 단정지었었다. '연암 박지원'에게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이 우리가 흔히 접해온 방식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뜻밖에 이 책은 역사팩션 소설이다.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는 '김지문'이라는 가공의 주인공이 선생이 내주는 숙제를 하나하나 완수해가며 좋을 글을 쓰는 방법을 터득해내는 식이다. 그리고 일종의 액자구성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가 '연암협일기'라는 소설을 읽고 소설 (액자) 내에서 연암과 김지문의 배움과 가르침이 전개된다.
책에서는 독서하는 방법과 글을 쓰는 방법이 여섯개로 분류되어있다. 이 책이 '글쓰는 방법'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독서하는 방법에 따로 장을 할애해 소설을 전개한 것은 그만큼 글쓰기에 올바른 독서가 선행되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쉽게 써내지만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읽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 써내는 글은 깊이가 없다. 자신의 생각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잡담같은 글이 되어버린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서 '법고창신'의 정신을 역설하는데,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법고'의 과정은 필수이다. 이 과정을 간과하고 '창신'만을 강조한 글은 통찰력있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책에서 좋은 글쓰기를 위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이의 묘'이다. 어느 정도 정밀하게 독서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상충되는 두가지 의견을 만나기도 한다. 좋은 글은 이 상충되는 두 의견의 한쪽에 완전하게 흡수된 글이나, 두 글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타협을 보는 글이 아니라 이 '사이'에서 통합적 관점을 만들어 새로운 제 3의 시각을 제시해 나가는 글이다. 이것은 단지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문화상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 가지 의견을 만나면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으로 어느 쪽의 의견도 그 고유한 문화의 상대성을 고려해 모두 존중해야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과 문화는 존중해주는 것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존중 속에서 서로의 의견 사이의 더 나은 생각들을 고려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발전을 이룩해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연암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어하는 자세는 바로 이러한 '사이'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고전과 현대의 삶 속에서 많이 달라 보이는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을 만나고, 그 속에서 책을 읽어내는 당사자가 어떤 제 3의 시각, 자신만의 생각들을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배워나가야 할 '미덕'일 것이다.
"우스갯소리 하나 해줄까. 포졸이 중놈을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가고 있었다. 중놈은 내내 도망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중놈은 주모를 구슬려 포승줄을 푼 다음 포졸과 옷을 바꿔 입고 머리를 밀어버린 뒤 포승줄로 그를 묶어버렸다...... 포졸은 세상 모르고 자다가 아침에 깨어 ....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중놈은 여기에 있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이 서평의 처음에 텍스트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라고 이야기했는데, 홍수가 났다고 꼭 물결에 휩쓸려 가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많은 책을 읽고, 자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명확한 관점을 세워 이 관점을 중심으로 다른 책들을 만나고 그 생각들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피력해나간다면 혹 글재주가 없거나, 글을 전개해나가는데 소질이 없더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지는 않는다는 데에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적어도 어떤 식으로 좋은 글을 써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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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곳곳에 SBS 항의 방문 공지가 붙어있다. '신의 길, 인간의 길' 요 프로그램에서 성경을 신화로 취급해 신성모독을 했으니 이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한다고 한다. ㅡ.ㅡ;;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기독교를 신화라고 포장했다고 해도 다른 시각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만 아닌가. 행여 보고 어이가 백만광년 달아날 정도의 내용이었어도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를 달아서 반박하면 그만 아닌가.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은 건설적인 비판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통찰의 기회를 준다면 더 좋은거 아닌가. 언제까지 "성경은 사실입니다. 믿쑴미까, 아멘"만 가르치려고 할꺼냐고!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는 신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가끔 교회를 빠지고, 예배 시간에 졸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지만.. 신이 없으면 힘들 때 누구한테 기도하고, 뜻밖의 좋은 기회를 만났을 때 누구에게 감사하고, 마음이 아플 때 누구에게 의지하나요?
읽은지 꽤 된 책인데, 교회 곳곳의 공지를 보고 답답해서 끄적여본다. 니체는 신을 믿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고, 도킨스 아저씨는 종교는 이성적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긴 했는데, 그래도 기독교와 신에 대해 이성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여유있는 신앙과 흔들리지 않는 논리를 가질 수 있는 맥그라스 부부 같은 사람이 주변에 한 명이라고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물론 책에서도 "학대증을 가진 신"이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더 큰 완전성을 위해" 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에 대한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답답하긴 매한가지였음. ;;
역자는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성서언어를 전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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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히친스의 이 책이 테레사 할머니에 대한 '단순한 야유나 폭로가 아니라 따스한 수녀의 인상에서 세속사에 냉혈한 근본주의 종교-사업가 인상으로 교정'이라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테레사 할머니가 일종의 사기꾼이라는 주장에 촛점을 맞춰서 그 위선을 공격하는데 그게 어찌나 적절해보이는지 여기에 대항과 반박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가능할까 싶다. -_- (cf. 도킨스 옹) 표지사진부터, 단어 하나하나에 테레사 할머니에 대한 가치판단이 듬뿍 묻어있어서 ("제비뽑기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 온 것이 존경받는 노처녀", "마더 테레사 자신이 우중선동가이며 우민정책가이고 세속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점") 재미는 있지만, 읽기가 썩 유쾌하지 않다. 게다가 나처럼 귀얇은 독자는 읽으면서 비판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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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나인데, 테레사 할머니가 운영하던 '죽음의 집'이 실제로 '죽어가게 내버려 두는 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사실인듯. -_-) 용서가 안된다. 딴 건 차치해도, 키팅이 사기쳐서 기부했다는 그 돈은 알면서 왜 안 돌려주는 겅미? 그 많은 기부와 후원금들을 대체 어디에 다 쓰거임? 죽게 내버려두는 집? 어이가 삼만광년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뭥미;;
*
유쾌하지 않은 책, 유쾌하지 않은 테레사 할머니.
(책읽는 고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억지로 몇 줄 남기는) 유쾌하지 않은 리뷰-ㄳ
95쪽.
과학으로 종교를 증명하기.
- 과학적으로 증명된 종교의 증거(예수님의 수의, 복잡한 생명체의 mechanism에서 '자명하게 도출되는' 절대자의 존재)들이 종교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많은 신학자들에게 사용되지만, 종교를 반증하려는 증거들에 대해서는 ‘신은 과학적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며 (왜냐면 신이니까!)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게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전자!)
97쪽.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의 재치 만점의 정의 -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103쪽.
비록 선한 신이 우리의 고통을 한탄할지라도,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우리 각자가 인내, 동정, 관용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성스러운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심하게 앓아야 하고, 일부 사람들은 남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앓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진지하게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병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 라이프니츠 ‘더 큰 완전성을 위해?’
181쪽.
"나는 언제라도 무지의 경외감보다는 이해의 경외감을 택할 겁니다. "
230쪽.
어느 한 종류의 입자, 이를테면 전자의 개수가 많다는 점을 근거로 스윈번은 그렇게 많은 입자들이 같은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 하나라면 괜찮다. 하지만 특성이 똑같은 전자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정말로 그의 회의심을 자극한다. 그는 모든 전자가 서로 다르다면 더 단순하고 더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 전자는 입자이며 파동인데 물질파 이론 혹은 미시입자를 측정할 때 변덕스러워지는 입자의 성질은 어찌 설명할 것입니까? 그래도 나는 변덕스러워보이는 물질파 이론으로 신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249쪽.
어떤 야생동물이 습관적으로 어떤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자연선택은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자연은 경박하고 기발한 착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령 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 냉혹한 실용주의가 이긴다.
- 지적설계론을 비판하기 위해 다위니즘을 인격화 혹은 강한 의인화 하는 거 같음. -_-;
276쪽.
만물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론이라고 한다.
- 과학 교과서가 말하는 것도 비슷해 보인다. 왜 RNA에는 hydroxy기가 잇는가? 가수분해가 쉽게 되기 위해.. 이건 아냐. -_-;
328쪽.
호혜적 이타주의는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의 비대칭 때문에 나타난다. 그것이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유독 더 잘 나타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비대칭이 더 크기 때문이다.
- 진화생물학의 표현들에서 간혹 혼란스러운 것은 ‘친족이 같은 유전자의 ~ 높기 때문에 돕는다’ 식의 표현인데 마치 진화론을 관리하는 혹은 설계한 절대가가 존재한다는 느낌. 마치 ‘구름은 비를 내리기 위해 만들어진다’ 같이. 차라리 (나같은 이해부족인에겐) ‘~높기 때문에 진화에서 살아남았고 그것이 자연선택되어 돕게 되었다’ 식의 표현이 나은 듯 하다.
354쪽. (CHAPTER 6-도덕의 뿌리 : 우리는 왜 선한가?)
-정리가 매우 안된다. 주관적인 정리를 해보면ㅡ
신-> 도덕 명제의 반론.
1. 진화적으로 남을 돕게 진화되어 왔다. (친족가능, 다시 돌려받을 가능성)-> 지나치게 일반적임.
2.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종교인/비종교인을 아우르는 인간 공통의 도덕률이 존재한다.
3. 칸트 등의 철학자들은 비종교적 근원에서 절대적 도덕을 이끌어냄 -> 도킨스씨 의견은?
* 도킨스씨의 의견은 이것인가? (내 평소 생각과 비슷하다)
- 진정 도덕적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아첨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덜 도덕적이라고? 그럼 우리는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하지? 진화적으로 그렇게 진화되어왔으니까? 이성에 절대적인 도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358쪽.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없이 이 도덕 규정이나 저 도덕 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판단의 문제이다.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
363쪽.
판관기 19장 25-26절.
- 나도 이거 읽고 화났음. -_-;
375쪽.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398쪽.
신 십계명
1. 남들이 당신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2. 매사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다.
3. 당신의 동료 인간들, 동료 생물들, 나아가 세계 전체를 사랑과 정직과 성실과 존경으로 대하라.
4. 악을 못 본 척하지 말고 정의를 구현하는데 주저하지 말라. 그러나 잘못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5. 기쁨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살아라.
6.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라.
7. 모든 것을 시험하라. 늘 자신의 생각을 사실에 비추어 점검하고 설령 소중히 믿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면 폐기할 태세를 갖추어라.
8. 검열을 하지도, 이의를 막으려 하지도 말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낼 권리를 늘 존중하다.
9.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견해를 수립하라. 남들에게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지 말라.
10.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라.
410쪽.
시대정신이 변하는 것이 관찰된 사실이며 종교가 그것을 이끌지 않는다는 것(성서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아마 중력 같은 단일한 힘이 아니라, 컴퓨터 성능의 기하급수적 향상을 가리키는 무어의 법칙을 추진시키는 것과 같은 다양한 힘들의 복합 상호 작용일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시대정신의 진행이라는 명백한 현상은 우리가 선하기 위해 또는 무엇이 선한지 판단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무너뜨리고도 남는다.
428쪽.
아마 과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의 의미를 어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한다. 내가 뉴질랜드가 남반구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때 근본주의자가 아니듯이 진화가 사실이라고 말할 때에도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증거가 진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으며, 그것을 반증하는 새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467쪽.
종교 신앙은 신앙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한, 빈 라덴과 자살 테러범들의 신앙에 대한 존중을 유보하기도 어렵다. 너무나 평범하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대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 신앙을 자동적으로 존중하라는 원칙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갖은 노력을 다하며 사람들에게 ‘극단주의’ 신앙이 아닌 신앙 자체를 반대하라고 경고하는 한 가지 이유다.
- 극단주의를 내재하기 때문에 신앙에 반대하는 것인가?
493쪽.
‘하지만 못해. 어떻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지? 나는 신이 필요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게다가 신을 믿지 않는 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 혼란스러웠습니다.
540쪽.
내가 아는 무신론자 대다수가 경건한 겉모습 뒤에 무신론을 숨기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지만, 비합리적인 믿음에 대한 모호한 애착심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믿음을 믿는다.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