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에 해당되는 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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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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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관람불가라는, 소설책에서 보기 힘든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래서 책 DB에서 검색이 안되나. 호러 소설이라 잔인해서 19세인가 했는데 그것보다 내용이 야하고, 그 수위가 거부감이 드는 정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엑. 잔인하기도 하지만, 잔인한걸로 치면 기시 유스케의 소설이 100만배는 더 잔인했지. -_- 어쨌든 19세 딱지는 단순히 책 홍보수법인 것으로 보임. 그렇게 따지면 P2P에서 쉽게 다운받을 수 있는 그 자료들이나 19세 접근금지 좀 걸어놔라. 어리고 착한 아가들을 변태들로 만들지 말고. (* 변명 : 나는 이 책이 19세라 읽은것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목을 따왔다길래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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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에 "이 책의 결말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다시 첫 장을 열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결말 읽자마자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에 첫 장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어봤다. 이런 탐정소설은 처음이라 작가의 섬세한 트릭에 한동안 멍했다. '전지적 작가'를 믿을 수 없으면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누구의 관점을 믿고 시선을 따라야 할까. 흔히 읽는 추리 소설에서 A가 범인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B였다던가, A가 사실은 이중인격이었다던가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A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저 지구 반대편의 갑돌이가 범인이었다는 결말.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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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큐언의 책에서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보았을 때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정상적인/비정상적인/그 중간 어드메에 존재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니 그것만큼 많은 종류의 정상적인/비정상적인/그 중간 어드메에 존재하는 성적 취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권의 책에서 극단적인 비정상적 욕구의 발현을 소개했지만, 그 중간 어느 지점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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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읽을 책은 <벚꽂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 책과 비슷한 추리소설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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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에 계속 비슷한 종류의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립적인 입장으로 쓴 과학적 회의주의 서적인것 같다. 지적 설계론, ufo와 seti, 뉴에이지 과학, 포스트모너니즘의 지적 사기 등 잘 알려진 논쟁거리 말고, 프로이트의 꿈이론, 소변치료요법;;, 식인풍습, 수비학 등 새로운 논쟁점을 던져주고 있긴 한다. 그렇지만 이런 주제들은 이미 출간된 <회의주의자 사전>이 있으니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고. 다만 저자의 어조가 색다른데 사이비 과학을 조목조목 까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저자는 과학/사이비과학의 양쪽 입장을 제법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어떤 글에서는 두 입장 중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글을 맺기도 한다.
머릿말에서 이 모든 것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어리석은'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현대 과학이 결국 이런 '악령'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물리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술의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주가 유한하고 다른 세계가 없어 기술이 도달할 수 있더라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cf. 괴델의 불완전성 : 산수를 포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복합한 모든 수학체계는 그 체계 내에서 참 또는 거짓이라고 증명될 수 없는 정리를 포함하고 있다. 단, 수리물리학에의 적용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그렇다고 거기에 사이비 과학이 껴 들어갈 틈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이비 과학은 무한한 평행우주들 밖으로 사라져버려랏.
2.
책에서 참고문헌으로 엄청나게 많은 재미있는 책들을 소개하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별로 없다는게 안타깝다. 그 중에 제일 읽고 싶은 건 굴드 아저씨의 "The Rocks of Ages". 그렇다고 내가 교양을 쌓자고 원서를 읽을 짬은 아직 없고. 나도 영미권에서 태어나서 수많은 영어 책들을 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우리는 바이링궈(bilingual)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좋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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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도 정치적으로 진보니 보수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20세기 중반의 쿤과 포퍼의 과학철학을 살펴보면 쿤보다 포퍼가 조금 더 보수적인 것 같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탄탄한 철학적 기반 위에 과학을 세우려고 했고, 포퍼는 검증의 개념을 반증으로 바꾼 것에서 차이를 보일 뿐 철학에 기반을 둔 과학이 결국은 합리적이고 실재적인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법한;, '상대성'을 과학에 도입한 급진적 과학철학자로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지은이 풀러는 "포퍼는 역동적인 탐구의 한 형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민주주의자이고, 쿤은 안정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과학에 초점을 둔 엘리트주의(혹은 보수주의)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의의 중심은 쿤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다. 쿤에 대한 가치판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책은 쿤-포퍼의 논쟁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쿤을 까기 위한 의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쿤이 과학의 사회적 기능을 '고의적으로 은폐'했고, '생략'하고 '왜곡'했다고 이야기한다.(물론 딱 한가지, 조직된 연구로서의 '패러다임'의 기능만 빼놓고!) 쿤의 방관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와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시대적 책임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쿤/하이데거주의자들의 정당화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것에 '거의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한 포퍼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도 빼놓지 않는다. 포퍼의 사상은 포퍼-라카토슈-풀러 순으로 계승되는 건가?
2.
아무튼 내가 이해한 것은 딱 요기까지고, 얇은 책인데 진짜 어렵다. 풀러는 쿤-포퍼 논쟁을 사회학적, 도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흄, 칸트(+신흄주의자, 신칸트주의자) 등 근대철학자들은 물론 하이데거, 하버마스, 아도르노 등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는 철학자들, 브루너, 브룬스비크, 피아제 같은 "뭐임? 먹는거임?" 질문을 던질법한 학자들까지 대부분의 사상가들의 논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설명한다. "포퍼가 아도르노와의 유일한 차이점은 계몽의 기획의 현 상태에 대한 관점이다." 이렇게만 띡 나오면 어떻게 이해하라는거냐;;
공부 못하는 애들이 번역탓 한다고... 전반적으로 번역문장이 길고 명사 만으로 문장을 이끌고 있어 문장 하나하나를 재번역해서 읽어야 한다. ("근본으로의 회귀는 또한 당대의 철학적 수사학에도 공적 생활을 어지럽히는 공약불가능한 담론들의 소음 저변에 깔린 언어 이전의 존재 근거에 대한 탐구로 반영되었다")
과학철학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철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사회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공부도 함께 해야할 것 같다. 아, 물론 과학 공부는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읽을 책은 칼 포퍼의 <현대 과학철학 논쟁>(아르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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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화가 중요할까. 진화론의 영향은 일반적인 문화에 대단히 널리 퍼져 잇어서 단 한마디 말로 그 영향을 요약할 수 있다ㅡ우리는 다윈의 시대에 살고 있다. (p.26)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이렇게 선언했다. <종의 기원>은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이후, 지식의 영토를 확장하는 도구로서 이제가지 사람이 손에 넣은 것 중 가장 막강한 도구이다" ... 에른스트 마이어는 이렇게 단언했다. "인류 역사상 다윈 혁명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지성의 혁명이었다는 주장을 논박하기는 힘들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전체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발상 중 하나가 바로 진화론이라고 얘기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우리가 대화를 나눌 만한 공통된 기반이 무엇일지 모색하다가 '진화'라는 답을 내렸다. 왜냐하면 진화는 우주 전역에서 공통적인 '범우주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pp. 71-72)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수억 종의 생물 가운데 한 종에 불과하다. 그 수억 종의 생물은 하나의 작은 행성에서 35억년의 세월을 거치며 진화했다. 그 행성은 하나의 평범한 별을 돌고 있는 많은 행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태양계 자체는 수천억 개의 별을 가지고 있는 한 평범한 은하계에 있는 수십억 개의 족히 될 태양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은하계 자체는 하나의 은하단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은하단은 다른 수백만개의 은하단과 다를 것이 없다. 그 수백만 개의 은하단은 팽창하는 거품 우주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 거품 우주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수의 거품 우주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다중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품 우주 안에 있는 은하계, 그 은하계 안에 있는 하나의 행성, 그 행성에 사는 한 종의 작은 하위 집단만을 위해서 설계되었고 존재한다는게 정말 가능성이 있는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바로 과학의 영적인 측면, 곧 '과학성(sciensuality)'이 자리한다. 어색하게 신조어를 만든 것에 양해를 구하지만, 이는 발견이 지닌 감성미를 반영하는 말이다. 만약 종교와 영성이 창조주 앞에서 경외심과 겸손함을 일으킨다고 하면, 허블 등의 우주론자들이 발견한 깊은 공간과 다윈 등의 진화론자들이 발견한 깊은 시간만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다윈이 왜 중요하냐면 진화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진화가 왜 중요하냐면 과학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왜 중요하냐면, 과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뛰어난 이야기, 곧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서사적 모험담이기 때문이다. (pp. 267-269)